한 도시를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하지만 파리만큼 읽기 즐거운 도시가 또 있을까? 굳이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보지 않아도, 루브르 앞을 걷다 보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맹세가 생각나고, 몽파르나스 주변의 극장과 난잡한 가게들과 식당 바들이 들어찬 거리를 걷다보면 에밀 졸라, 아폴리네르, 헤밍웨이, 사뮤엘 베켓 등이 드나들던 카페가 반짝거리고, 지금은 쇼핑으로 유명한 마레 지구도 발작의 발자취를 찾아 걸어 볼 수 있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파리를 걷는 즐거움은 배가 될 것이다.
물론, 책을 더 이상 읽지 않은 사람도 있고, 독서량이 점점 줄어드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나, 프랑스에서나 사회적 고민거리다. 프랑스에서는 독서를 계속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 혹은 책임감이 전반적으로 자리 잡고 있고, 최근 22년도 프랑스 국립 도서원(CNL)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라도 여전히 많은 프랑스 젊은이들이 책을 읽는다. 81%의 7세에서 25세의 아이들과 젊은이들은 취미로 독서를 즐긴다고 답했다.
혼자서 독서 습관을 들이기 힘들다면 독서 클럽에 가입하는 방법도 있다. 파리를 비롯 프랑스 각지에는 독서 클럽들이 굉장히 많은데, “들쥐의 소녀들(Les Filles du Loir)” 독서 모임도 처음에는 친구 다섯 명이서 만든 친목 모임이었다. 이름이 하필 '들쥐의 소녀들'인 이유는 다섯 명의 여자들이 마레 지구에 있는 작고 아담한 카페, '찻 주전자 속 들쥐'(Le Loir dans la théière)에서 모여 책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들쥐'에서 모이는 '여자들'이 들쥐의 소녀들이 된 것이다. 낡은 안락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에 책들을 잔뜩 쌓아두고, 각자 읽은 책을 추천하고, 비평하고, 때로는 소리 내어 낭독하기도 했다.
https://www.lesfillesdulo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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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filles du loir, association de lecteurs, lectrices. Promouvoir la lecture d'oeuvres contemporaines. favoriser l'échange. Rencontrer les aute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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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임이 점점 활성화 되면서, "들쥐의 소녀들"은 자연스럽게 공식 단체로 자리 잡았다. 2004년 시민 단체로 등록하고, 100명이 넘는 회원을 받았다. 더 이상 마레 지구의 자그마한 찻집에서는 토론이 불가능한 규모가 된 것이다. 그래서 초창기 멤버들이 단골로 찾는 서점이나, 도서관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각 모임에 작가를 직접 초대해서 독자들과 만남을 갖는 형식으로 더욱 풍성해졌다. 직접 작가를 초대하다 보니, 동시대 작가, 신인 작가,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을 지원하고 알리는 역할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내가 '들쥐의 소녀들'을 찾은 것은 어느 금요일 저녁, 무프타 거리(Mouffetard)와 애두아르 크뉘(Edouard Quenu) 등 오거리가 만나는 곳에 숨어있는 '트라베세(Traversées, 프랑스어로 교차로라는 뜻)' 서점에서였다. 환하게 불이 밝혀진 서점 속에 약속 시간 전부터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비가 살짝 내려서 불빛이 더욱 환하게 빛나 마치 연극 무대 위에 올라온 기분이었다. 그날 초청된 작가 니콜라 카바이예(Nicolas Cavaillès)의 자그마한 소설책, "슈만의 아이들 8명"을 팔에 끼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미 작가를 중심으로 테이블 주변의 의자는 가득 차 있었고, 그 주위로 좁디 좁은 통로마다 회원들이 앉거나 서 있었다. 하나같이 가방이나 팔에는 오늘 주제가 되는 책 말고도 두세 권씩 책을 끼고 있었다. 모임이 시작하길 기다리면서 서점의 책을 뒤적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부분이 젊은 30대에서 40대 여성이었고, 가끔가다 남성도 있었다. 여자가 남자들보다 독서량이 많다는 설문조사를 반영하는 듯했다.
모임의 대표인 마린이 시작을 알리고, 한 시간 정도 서로 자신이 한 달 동안 읽은 책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래픽 노블부터, 만화, 동화책, 소설, 에세이, 인문서적 등 그 분야는 다양했다. 한 시간 정도 활발하게 이런저런 책에서 나눈 다음, 다시 한번 마린이 회의를 주도하며 본격적으로 카바이예의 소설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갔기에 망정이었지, 실재로 토론의 수준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문장 하나하나, 인물 하나하나에 대해서 깊이 있는 분석을 해나가는 회원들을 보면서 급히, 이야기만 대충대충 읽고 갔던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재발견할 수 있었다. 실존 인물인 음악가 슈만의 실제 자녀들에 대해서 쓴 소설이니만큼 현실과 픽션 사이의 교차도 흥미로웠다. 작가 니콜라 카바이예는 슈만이라는 인물에 대해 배우고 나서 바로 이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한 시간동안 질의응답을 마친 회원들은 자연스럽게 뒤편에 차려진 와인과 안주거리를 즐기며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인을 마친 카바이예 작가도 머쓱해하며 독자들 사이에 껴들려고 서성이는 모습을 보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벌써 세 차례나 들쥐의 소녀들의 초대를 받았다고 한다. 직접 독자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여서 언제나 흔쾌히 초대에 응한다고 말하며 수줍게 웃었다.
파리의 독서 클럽은 단순히 책을 읽자는 구호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책을 읽을까 하는 실질적인 고민에서 나온 하나의 대안책이다. 오늘도 파리 곧곧의 카페나 술집, 다락방, 누군가의 집 응접실에서는 책을 사이에 두고 열띤 대화를 나누는 파리지앵들이 있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장소, 유명하지 않은 작가면 어떤가. 내일의 지식인이나 작가들이 거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 사르트르도 생전에는 되마고(Deux Magots)카페에서 커피 한 잔으로 반나절 동안 자리를 축내던 반갑지 않은 손님에 불과했었으니 말이다.
찻주전자 속 들쥐(Le Loir dans la théière)
주소 : 3 rue des Rosiers, 75004 Paris
월요일-금요일 아침 9시 부터 저녁 7시 30분까지
트라베세(Les Traversées) 서점
주소 : 2 Rue Edouard Quenu, 75005 Paris
매일 아침 10시부터 저녁 7시 30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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