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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배우기 apprendre le français

드라마 <더 글로리> 를 보며 앙리 베르그송의 "웃음"을 떠올리다

by 에페메르 2023.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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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화재가 되어서 저도 한 번 봤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막 "와 진짜 구성 미쳤다." 정도의 감탄사는 나오지 않더라도(가끔 억지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고요)
그냥 안타까울 만큼 현실적인 우리의 모습이라 그냥 씁쓸한 다크초콜릿 녹여 먹듯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하도영과 문동은이 첫 바둑 대국 장면(1 시즌 4화)은 인상 깊었는데요,

하 - 기원 오랜만에 오셨죠?

문 - 네, 먹고 사느라

하 - 뭐 해서 먹고 사는데요?

문 - 순진한 남자 등도 치고 울리기도 하고 

하 - (조용한 웃음)

이 기원 내 장면 하나하나가 미학적으로도 그렇고, 대사도 그렇고, 배우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너무 인상 깊었는데, 이 글 쓰면서 찾아보니 이 장면에 제작팀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고 하네요. 역시 정성이 통하면 감동을 주는 모양입니다. 

 

“이 대사는 꼭 쓰고 싶었다…” 김은숙 작가가 작정하고 썼다는 '더 글로리' 송혜교 장면

'더 글로리' 비하인드 영상에서 밝힌 내용,김은숙 작가가 비명 질렀다는 '더 글로리' 장면

www.wikitree.co.kr

아무튼 이 픽 터뜨린 하도영의 웃음에서 문득 요즘 읽고 있는 앙리 베르그송의 "웃음"이 생각이 났어요.

https://www.puf.com/content/Le_rire

 

Le rire

« Nous ne viserons pas à enfermer la fantaisie comique dans une définition. Nous voyons en elle, avant tout, quelque chose de vivant. Nous la traiterons, si légère soit-elle, avec le respect qu’on doit à la vie. Nous nous bornerons à la regarder g

www.puf.com

앙리 베르그송 (Henri Bergson) 1859~1941
프랑스 철학가, 콜레쥬 드 프랑스 교수 
웃음 (Le Rire), 희극의 의미에 대하여
출판사 PUF

당시 프랑스와 한국인들의 웃음 포인트에 관하여 흥미롭다고 느꼈기 때문에 구매했고,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었던 책이었어요. 웃음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깊이 있게 다룬 철학가의 단상이 담긴 책입니다.

철학책은 사실 번역서보다 원서를 읽는 것이 더 편한 경우도 있어요. 철학자의 개념 자체가 가끔은 언어유희처럼 아주 아슬아슬한 언어의 구성 위에 성립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기 때문에, 번역가님 본인이 굉장히 철학적인 조예가 깊지 않은 한, 정말 번역하기 힘들어요. (그런 점에서 철학서 번역하시는 번역가님들에게 잠시 박수와 위로를 보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읽기도 굉장히 힘들고요. 한국어는 한국어인데 굉장히 낯선 글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안타깝게도 많죠. 

저는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 깊이 있는 책을 매우 얄팍하게 읽었어요. 그래서 얄팍한 저의 독서로 아주 쉽게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베르그송의 웃음 

베르그송은 굉장히 기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웃음을 분석했습니다. 그래서 웃음이 언제 왜 터져 나오는가 그 순간들을 나눠 확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죠.

웃음은 인간성과 관련이 있다

사람은 동물이나, 사물에 대해 웃을 때에도 그 동물/사물이 떠오르게 하는 "인간적인 면모"에 웃게 되어 있다.

웃음은 지적인 활동이다

주체는 웃음을 유발하는 대상과 정신적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느낄 때에만 웃을 수 있다는 뜻인데요. 쉽게 풀자면, 본인이 꽈당하고 넘어졌을 때 그 순간에는 아프고 당황해서 웃음이 나오지 않죠. 당장 그 상황을 지적으로 분석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넘어지고 나서 좀 시간이 흘러, 주변에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들도 인식하게 되고,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우스꽝스러움을 인지하게 되면 그 순간에 웃게 되죠. 

같은 예로 베르그송은 "깊은 애정의 대상이나 동정의 대상을 두고 웃을 수는 없다." 평소 애정하고 동정하는 대상일지라도, 그 대상을 두고 웃는 그 순간에 만큼은 그 애정과 동정이 잠시 정지된 상태라고 합니다. 

웃음은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베르그송은 웃음에 어떤 유용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웃음 자체가 의미를 갖는 시점도 사회생활 속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의미, 공공 생활의 어떤 요구 상황에 조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프로이트처럼 웃음이 무의식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는 대신에 어떤 사회적 기능성을 수행한다고 봤어요. 보통 웃음은 어떤 상황의 부조리함을 포착하고, 그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음을 인지했을 때 웃음으로 폭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베르그송은 우리 인간 사회가 점점 더 평안하고 조직화된 사회로 진화하면서 반사회적인 인간의 본능을 억누르기 위해 웃음이 쓰인다고 봤습니다. 보통 희극이나 코미디 쇼를 보면서 우리가 웃는 이유는 그 쇼에서 우리 인간의 반사회적인 면모를 적나라하게 까기 때문이라고 봤는데요. 바로 우리가 고쳐야 할 점들, 우리가 부족한 점들을 지적하면서 그걸 수정할 수 있도록 장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학교에서는 코트와 모자를 그대로 착용한 채 교실에 앉으면 안 돼요. 그런데 그런 문화적 요소를 몰랐던 한국인 학생이 교실에 들어와 추우니까 코트를 그대로 입고 자리에 앉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교수가 들어와서 그 한국 학생에게 "왜, 어디 갈 데 있어요?"하고 물었는데, 학생은 고개를 갸웃하며 "아뇨, 왜요?"라고 묻는다면 프랑스 학생들은 풋 하고 웃을 수도 있죠. 왜냐하면 한국 학생의 행위 자체가 "웃음거리", 즉 반사회적인 행동,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니까요. 

베르그송의 웃음은 화목하게 하하 호호 웃는 웃음이 아니라 키득, 푸핫, 하고 우리들이 주체 못 하고 터뜨리는 약간의 조롱기 섞인 웃음을 뜻하는듯합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도, 이 사람이 말하는 웃음이란 것은 엄마를 향해 걸어오는 아가를 보며 엄마가 짓는 환한 미소, 웃음, 기쁨의 환호 이런 것들과는 거리가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그럼 이 분석을 갖고 다시 한번 앞서 더 글로리의 대국 장면을 볼까요?

하도영은 문동은의 말에 유독 웃음을 잘 보입니다. 베르그송은 웃음의 표출 포인트를 우리의 삶 자체가 굉장히 유동적이고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인간 인식에 있다고 봤는데요. 베르그송이 들었던 치타의 예를 들어볼게요. 사바나의 초원에서 수풀 사이를 자유롭게 뛰어가는 치타의 모습은 슬로 모션으로도 몇 번 보셨을 거예요. 굉장히 유연하고 자연스럽고 아름답죠. 그런 장면을 보고 "아 웃겨"하며 웃지는 않겠죠. 그런데 그렇게 멋지게 달리던 치타가 발을 헛디뎌서 우당탕탕 미끄러져버리고 말았다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경이로운 장면이 예기치 못하게 툭 끊겨버린 것이고, 그럼 우리는 웃을 수 있겠죠. 

마찬가지로 하도영은 자신이 살고 있는 매끄럽고 아름답고 (올 디올...) 완벽한 삶이 흐름 속에서 예기치 못한 말들을 툭툭 던지는 문동은의 모습에 웃게 됩니다. 웃음의 대상 자체는 문동은이라는 사람이 아니고, 그 사람이 언급하는 이 세상, 이 세상의 부조리함, 이 세상의 야만성 등입니다. 그런 면모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차분하게 까발리는 문동은이라는 여자에게 끌리게 되는 것도 어쩌면 문동은이 그런 웃음 유발자이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 대국 장면이 보는 시청자의 기억에 남았던 장면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극히 제 주관적인 독서와 주관적인 감상을 바탕으로 적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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